미스터 하이


그 도록이 갖고 싶었다. 전시장에서는 한정 수량만 배포했고, 서점에 입고된 소량의 재고도 소진되어서 구하지 못했던, 비교적 넓은 판형에 중철 제본된 아트지 재질의 그룹전 실키네이비스킨의 도록. 작가에게 몇 권이 남아있지만, 더는 풀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광범위한 성폭력에 연루되어 미술계를 충격에 빠트렸던 큐레이터가 도록의 서문을 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도록이 너무 갖고 싶었다. 하지만 저는 그 도록이 너무 갖고 싶었는데요, 전시장에서도 서점에서도 구하지 못했는데요…. 라며 말끝을 흐리자, 작가는 조금 있다가 말없이 구석에서 도록을 한 권 꺼내 주었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화끈거려 스튜디오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오픈 스튜디오 기간에 무료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말라 비틀어진 잔디로 뒤덮인 하늘공원을 중앙으로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공원의 가장자리를 성기게 두르고 있는 나무의 앙상한 가지가 흐린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높이도 시간도 가늠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대기에는 볼륨이 없다는 점에서 악몽과 닮은 면이 있다. 그 악몽 속에서는 결절(node)들이 눈앞의 화면에 방사형으로 펼쳐지는 대신, 입체적인 망망대해로 응축하며, 나는 그 속에서 원경과 근경의 거리조절을 하지 못하는 채로 떠다니다가 가위에 눌려버린다.

스튜디오 중앙에 놓인 조립형 앵글에는, 5호에서 15호 사이 정도 되어 보이는 비교적 작은 크기의 캔버스들이 세워 놓여있었다. 이들은 작가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한 ‘날씨 회화` 연작으로, 포개진 채로 디스플레이되어있었기 때문에 캔버스 옆면에 칠해진 색감으로 개별 피스의 분위기만 짐작할 수 있었다. ‘날씨 회화` 연작은 작가가 작업실과 그가 생활하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환경적 상태, 변화, 조건을 관측하고 이를 즉흥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전통적인 도구인 붓이나 물감을 이용하는 대신 스프레이를 캔버스의 옆면에 분사한다. 분사된 물감은 그날그날의 대기의 상태와 조건에 따라 다르게 캔버스의 전면에 침범한다. 앞면에서 보면 화면의 가장자리가 강조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드 엣지(hard edge)경향의 모노크롬 회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금욕적이고 정신적인 모노크롬의 표면과 달리, ‘날씨 회화’의 표면은 무언가 깔끔하지 못한 채로 내버려두고 있다. 그건 캔버스의 볼륨, 혹은 옆면, 혹은 두께에 가서 붙지 못하고 전면으로 비져나와버린 대기(大氣)의 흔적이다.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대기의 상태와 변화의 흐름을 포착하여 그것을 머무르게 하는, 축적된 기록으로서의 캔버스는 회화를 넘어 아카이브적 기능마저 가진다. 다만 이 화면들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물리적 볼륨을 생각해보면, 퍽 비효율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두껍고 무겁고 불에 잘 타는 날씨 기록 매체라니…. 그러나 손으로 수행하는 기록 행위는 근본적으로 효율성보다는 놀이에 가깝다, 괜찮다.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보다 가벼워서 휴대할 수 있고  따라서 어디서나 열람 가능하고, 불에도 타지 않는 아카이브를 만들어보자. 먼저 노드를 입력한다. 그다음에는 이벤트를. 이벤트에 포함된 노드를 파악하고, 새로운 노드로 추가한다. 그 노드가 포함된 또 다른 이벤트를 입력하고, 반복. 데이터가 늘어남에 따라 동일 노드에 대한 표기가 달라지고, 노드 리스트가 불확실한 이벤트가 늘어난다. 노드를 포함하지 않는 이벤트는 가시화되지 않으니까, 일단은 추측해서 채워 넣는다. 추후 확인 요망, 확정 보류. 더욱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이벤트에는 따로 파라미터 값을 매긴다. 중단, 공백기, 반복, 오류 발견, 동일 노드의 표기법 통일, 제안, 수렴, 기존 링크의 유실. 커먼센터는 미스터하이 코코메디쎈플러스가 되었다. 삭제, 반복, 오류, 걷잡을 수 없음, 노드의 불쾌감을 삼, 잠정 중단. 공백, 재개, 이전에는 유효하던 링크가 무더기로 유실되어있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13년의 끝자락 영등포구 경인로에 오픈하여 2년 3개월간의 운영을 끝으로 폐관한 미술 공간 커먼센터의 웹사이트는 대부분의 프로젝트 성 웹사이트와 마찬가지로 링크가 유실되어, 현재는 미스터하이 코코메디& 메디쎈플러스라는 이름의 성기 동맥혈류 충전기(Cavernosal artery)라는 생소한 종류의 남성 성 기능 장애 개선기구 제품 광고 페이지로 이어진다. 하단에는 남성 페니스의 혈액을 저장하는 공간인 ‘해면체`를 진공 상태의 강한 압력으로 팽창, 수축 운동을 반복시킴으로써 ‘인간의 의지’보다 훨씬 더 크고 묵직하게 확장해준다고 쓰여있다. 설명 위에는 6명의 연인을 두고 수십 년간 8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주간지에 이름을 떨쳤던 탤런트 유퉁이 굳세게 주먹을 쥐고 있다. 유퉁은 대구예술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였지만, 80년대 <전원일기>나 <한 지붕 세 가족>과 같은 공영 방송의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탤런트로 더 얼굴을 알렸다. 우락부락한 생김새와 커다란 체구 탓에 주로 어깨 역할을 맡곤 했다.

유퉁이 38세이던 1995년, 당시로 17세 연하였던 미모의 여승 해선 스님에게 구애하기 위해 며칠을 산사에 묵으며 “네가 파계를 하고 나한테 오면, 내 너에게 진정한 해탈의 열반을 시전해주마”라고 설득하여 사흘 만에 여승이 승낙의 의미로 염주를 목에 걸어주었다는 이야기는 세간에 수없이 오르내렸다. 현재로써 그의 마지막 결혼은 2017년으로, 33살 연하의 몽골인 여성 잉크아물땅 뭉크자르갈과의 가정생활에 정착했다. 이 또한 순탄치는 않았다. 2013년 몽골에 건너가 첫 번째 결혼을 올리기 전날, 평소 왕래가 없던 뭉크자르갈의 이모가 나타나 친척들에게도 선물을 요구했을 때, 유퉁의 통장은 이미 마이너스 1억에 달해있었다. 뭉크자르갈은 말했다. 많은 여자 있으니까 가세요, 내일 다시 한 번은 없어요. 그때 당시를 회고하며 유퉁은 “결별은 일종의 해프닝"이라고 일갈했다. 내일 다시 한 번은 없는 해프닝.

한편 언제부터 가십거리나 사건 사고를 ‘해프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 그 기원은 1970년 6월 20일 을지로의 소림 다방에서 결성된 한국 전위 예술가 집단 <제4집단>의 행태를 보도하던 주간지의 관습에서 찾을 수 있다. 1968년 제2한강교에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이 모여 문화 사기꾼’(사이비 작가), ‘문화 실명자’(문명 공포증자), ‘문화 기피자’(관념론자. 19세기적 현대인), ‘문화 부정축재자’(사이비 대가), ‘문화 보따리장수’(정치 작가), ‘문화 곡예사’(사실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사실로 눈치 보며 왔다 갔다 하는 시대 미학의 편승자)’라고 쓰인 비닐 옷을 태우며 기성 미술계의 타성을 고발했던 <한강 변의 타살>은, 그 급진성만 두고 보면 한국 해프닝 역사의 수작이라 할 만 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대중오락 잡지이던 <선데이 서울>, <주간 한국>과 같은 주간지가 해프닝의 내막과 사회적 의미를 희화화하여 오락 소재로 삼는 데 열중하던 탓에 다소 엉뚱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한강변의 타살>이 비교적 다양한 기록 사진 및 회고록을 남기고 있는 이유는, 당시 주간지에서 ‘전위 아가씨`로 떠오른 정강자가 예의 ‘나체쇼`를 벌일 줄 알고 해프닝 현장에 백여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관객은 『여자가 벗는다기에 왔더니 벗지도 않고 춥기만 해서 재미가 없다』며 투덜투덜 돌아섰고, 그걸 엿들은 어떤 젊은 관객은 저런 친구가 바로 「문화 실명자」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흥미 본위의 주간지는 <제4집단>의 예술사상인 ‘무체주의(無體主義)’를 ‘인체를 얽어놓고 무체라니 웬 말’이라는 소제목으로 조롱하는가 하면, “작품보다는 ‘옷 잘 벗는 것’으로 더 유명한 전위화가 정강자씨가 오랜만에 ‘푸짐한’ 해프닝 쇼를 마련했다”며 예술가 정강자를 성적대상으로 묘사하곤 했다. 해프닝은 미술계에서 ‘전위를 위장한 사이비 미술`로 매도되었고, 70년대에 들어서는 내무부에서 발표한 퇴폐적 사회 풍조 일소 방안에 따라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대신 김용민의 <금 긋기>, <칠하기>, <끈 당기기>, 혹은 이건용의 <걸음 걷기>, <과자 먹기>, <다섯 걸음>, <건빵 먹기>, <10번 왕복>, <나이 세기>, <5번의 만남>, <물 마시기>, <성냥 켜기>, <물 붓기>와 같은 실험 예술이 ‘해프닝’을 대체하여 ‘이벤트`로 호명되기 시작했다. 전위 예술이라는 단어도 실험 예술로 대체되었다. 궤변 같지만, 당대 이론가들의 분류에 따르면, 해프닝은 즉흥적이고 쇼킹한 데 반해, 이벤트는 계획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회화에서도 시대의 타성과 혼돈을 타계할 묘책으로서 논리 정연한 기하학적 구조를 추구하는 탈앙포르멜 운동을 통해 기존의 뜨거운 서정성을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었다. 70년대 한국 미술계에 경계의 설정과 확인 및 반복에 집착하는 이벤트, 그리고 화면의 범위와 경계를 명확히 하는 하드 엣지와 같은 형식주의가 당도했다. 그들은 스스로가 정한 한계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유한하게 자유로웠다. 당시 동물원이었던 창경원에는 대한민국의 첫 번째 코끼리인 자이언트와 태산이 살고 있었는데, 난폭한 수컷 자이언트에 반해 비교적 유순한 편이었던 암컷 태산이 대신 밤마다 탈출을 시도하고, 이게이 여의치 않자 울타리를 따라 빙글빙글 도는 정형 행동을 보이자, 창경원 나들이를 온 실험 예술가가 거기서 형식주의의 원천을 발견하고는 동물원 폐장 시간까지 코끼리를 따라 울타리를 돌았다는 웃지 못할 일화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화려한 배우 시절과 사랑에서의 오랜 방랑을 뒤로하고, 울퉁불퉁 유퉁은 비로소 본격적인 화업을 전개함과 더불어 오랜 기간에 걸쳐 꿈꿔오던 미술관 건립에 착수한다. 2009년 제주도에 3500여평의 야산을 매입하여 짓기 시작한, 황토방과 몽골식 건축을 접목한 유퉁의 엉터리 공화국 및 유퉁 아트월드는 자금 부족으로 건립이 중단된다. 아마 생이 다 할 때까지 미술관을 다 짓지 못하리라는 예감에 서린 회한 때문이었을까, 유퉁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예술 형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2017년 부산 감천마을에 유퉁이 ‘해꿈(해 뜨는 언덕, 꿈꾸는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재능기부 제작한 타일 벽화는, 정교하게 커팅된 타일 조각 하나하나의 색감을 고려하여, 보조 없이 유퉁이 직접 붙여 완성한 작품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덧칠해야 하는 벽화와 달리 백 년은 변함없이 가는 예술에 대한 그의 사랑은, 2016년 그가 월간 미술세계의 요청을 받아 작성한 동유럽 미술 기행 리포트에서 가우디의 건축물을 상기하며 ‘장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투자하여 몇십 년에서 몇 백 년까지 후손으로 이어지며 지어져 후손들을 먹여살리는 무공해 관광산업’이라 일컬은 데서도 잘 드러난다. ‘미술세계와 함께한 동유럽 7박 9일’이라는 제목의 유퉁의 리포트는 월간 미술세계 통권 385호에 실려있다. 같은 호의 특집 주제는 ‘신생공간 그 너머/다음의 이야기`로, 편의상 신생공간이라 불리웠던 일련의 대안 미술 공간에 관한 때늦은 갈무리 기사였다. 사후적이고 약간은 부정확한 서울의 신생공간 지도에는, 이미 운영을 종료한 지 일 년 가까이 된 커먼센터가 상징적 노드로 여전히 표시되어있었다.

학부를 졸업하고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주말 서빙 알바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어느 늦여름, 지수와 상수 인근의 조그만 가정집을 미어터지게 나눠 쓰고 있는 장승업과 하루 같이 벽화 알바를 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벽화가 아니라 타일 벽화라는 것을 영등포의 작업 현장에 도착해서 알게 되었다. 주택가의 담장에다가 여러 가지 색깔의 타일 조각을 붙여나가며 대충 나무 모양을 만들어가면 되는 단순 작업이었다. 멀쩡한 타일을 짝으로 사다가 그걸 망치로 깨서 시멘트를 발라 붙이는 프로젝트에 돈을 주는 공공미술 사업을 위해, 장승업은 여름 한 철 내내 장도리로 타일을 깨고 있었다. 골목의 초입부터 안쪽으로 들어가며 타일 조각을 붙여나가며, 진행 방향에 따라 계속해서 타일 더미도 움직여야 했다. 점심 이후로 늦여름의 햇살이 예각으로 내리쬐자, 견딜만하던 더위도 성가셨다. 해질?에는 너무 고되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스즈끼복 차림으로 지수와 장승업의 상수 작업실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현관 복도에 걸터 앉아 담배를 피웠다. 장승업도 씻고 나와 젖은 머리를 젤을 발라 넘긴 뒤, 작업실의 냉장고에서 마시다 말고 넣어둔 듯한 스타벅스 테이크아웃 컵을 꺼내들며 현관을 나섰다. 지수는 장승업이 작업실을 놔두고 뻔질나게 카페를, 그것도 제비다방이나 스타벅스같이 비싼 곳을 드나드는 것이 다소 불만이라고 했다. 아마 제 커피값 지출도 덩달아 늘어 그런가 했다.

그즈음에 나는 지수에게 한 달 동안 방을 내어주고 있었다. 군산에서의 개인전을 앞두고 인천 집과 서울 작업실을 오가기가 멀다는게 그 이유였다. 그는 체면치레로 밥을 사겠다고 했다. 프랜차이즈 뷔페형 식당에서는 제철을 맞아 여러 가지 종류의 새우 특선 요리가 있었다. 장승업은 제주도에서 사촌을 도와 인테리어 일을 하다가 벽화때문에 잠시 서울에 올라온 거라고 했다. 올라온 김에 강남의 갤러리에서 열리는 청년 작가 아트페어에 소품 몇 점도 출품했다. 삼 년 제주도 살이에 서울 저가 뷔페식당의 새우들이 성에 찰리가 없었기에, 장승업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어스름이 남아있는 검은 하늘 아래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지수와 장승업은 작업실로 돌아가고, 나는 조금 걷다가 집으로 향했다. 무언가 만들고자 했고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의지만 남고 의미는 사라져버린 시도들에 대해 생각했다.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타일을 깨서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하는 일, 같은 것들. 1843년에 태어나 오십 세 언저리에 돌연 종적을 감춘 오원 장승업은 술을 목숨만큼 좋아해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셨으며, 때론 한 달이 되도록 깰 줄을 몰랐다. 그림을 그릴 때 말술을 즐겨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왕왕 있었고, 한자를 몰라 문자가 서툴렀기에 20세기 초부터 위작이 많았다. 그러니까 오원의 그림이라는 것들 중에서 한 사람이 그리고 쓴 듯 그림과 글이 잘 어울리는 그림은 위작이다. 사기꾼은 분명한 것보다 모호한 것을 좋아한다.

모호한 것이라 하면, 일자리를 창출하는 동시에 공공의 이해와 지역사회에의 공헌을 동시 발생시키는 (허구적 자동 기계로서의) 사회적 기업, 도심 유휴부지 활성화와 활용도를 극대화하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서울형 저 이용 도시공간 혁신 시민 아이디어, ‘청년’의 페르소나와 업사이클링 판타지,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와 마을활동가, 사회 혁신을 민간에 아웃소싱하기, 민간비영리 단체 보조금 집행 기준을 준수하는 지역문화 예술 활성화 지원사업, 같은 말들의 모호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청년성, 네트워크성, 지역성, 기획성을 고려하여, 기금을 받았다는 전제 하에 향후 창작 계획 및 기대 성과를 제출하는 일을 반복하기. 차라리 문화 실명자, 문화 기피자, 문화 부정축재자, 문화 보따리장수, 문화 곡예사 중 하나가 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어머니, 남 도와서 밥 벌어먹겠습니다.’라는 사회적 기업의 캐치프레이즈를 인용하며, 우리들의 작지만 꾸준한 모임으로, 책을 읽고 밥을 먹고, 미래에 대해 고민도 하며, 서로간의 정서적 안전망이자 울타리가 되어 지속 가능성도 도모한다는 점을 어필해야 쥐꼬리만한 지역 청년 활동 모임 활동비를 받을 수 있다. 행정이 원하는건 명확한 것 처럼 보인다. 주기적으로 모여 공방 활동같은걸 하고, 그 광경을 사진으로 남기고(식대를 받은 참여 인원이 전부 나오도록, 2장 이상),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고, 사업 수행기간동안 만들어낸 결과물을 ‘전시회`나 ‘공연`의 형식으로 발표하고, 그것을 또 기록해서 남기고, 결과보고서를 작성하고, 제출하기. 이건 시장 스탈린주의의 리비도로 기능하는 보모국가의 중앙교환국 없는 카프카적 관료주의다, 같은 헛소리를 써본다. 요는, 나는 이런 것들을 잘 하게 되기도 전에 넌덜머리가 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 사기꾼 같은 언사들이, 이 길도 저 길도 가지 못할 때 이르는 막다른 종착지라고 비웃지만, 한편으로는 그 안의 진중한 활동가를 모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실을 놀림거리 삼았다가는 어떤 대가를 치를지 모르므로, 우리는 가짜 앞니를 끼운 토니 에드만의 미소를 따라하는 사진을 찍어 메신저 스티커를 만들고 놀거나, 임권택의 취화선에서 오원 장승업이 제자들에게 호통치는 장면들을 호미 화방에서 다시 찍어야 한다고 낄낄대며 사이다에 소주를 타 마신다. 놀릴 수 없는 현실은 다음과 같다. 가령 연신내 부근을 지나칠 때 도로의 양옆에 선 휴대폰 판매 삐끼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적당히 봐가면서 공격적으로 호객을 한다. 저기요! 잠시만요! 아 잠깐만요! 하고 외치는 소리는 그 의도를 알고 있더라도 얼결에 걸음을 주춤하게 하는데, 그때를 놓치지 않고 삐끼들은 집요하게 눈을 맞추며 말을 걸어온다. 그전에는 몰랐다. 휴대폰 판매업이란 일종의 신종 대부업과 같아서, 삼 개월 이상 요금이 연체되면 공덕역 앞 신용보증기금이라는 이름의 비밀스러운 황금색 빌딩에서 통신사의 채무를 넘겨받는다는 것, 그들이 제1금융권에서 채무자의 신용 한도를 실제로 떨어뜨릴 수 있는 권한을, 믿거나 말거나 가지고 있다는 걸 빌미로 무시무시한 협박성 문자를 보내고, 문해력과 현실 지각능력이 떨어지는 청소년들이 지레 겁을 먹고는 대출업이나 온라인 중고매매 사기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을 그런 일에 휘말린 아이들에게 검정고시 공부를 가르치다가 알게 되었고 그런 삶을 살아본 적 없는 나는 도울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까 뭐라도 도우려고 하는 사람들, , 자신이 살아본 적 없는 삶을 도우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대단한 것이다. 활동가의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보거나 청소년 문학 전집을 읽고 책동아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산부인과에 동행하고 자해를 그만두게 하는 것이었다. 예술이란 게 개입할 여지가 있다면, , 치유 혹은 스트레스 해소라는 목적 아래 도구화되기 일쑤다. 나는 도울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돕지 못하는 채로, 근거리에서 아이들의 불운과 욕설을 실리카겔처럼 흡수하며 쇠약해져 갔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듯한 가위에 눌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교사로 일하면서 번 돈으로 집 근처 상가의 옥탑에 작업실을 얻었을 때였다. 꿈속에는 텅 빈 작업실의 전경이 그대로 등장했다. 누군가 내가 마시다 말고 닫아놓은 탄산수 뚜껑을 치익 하고 열었다. 한 명은 누워있는 내 곁에 앉아 내 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기이했던 것은, 가위눌리는 와중에 목을 조르는 손의 영, 그리고 내 음료를 훔쳐 마시는 저 영과 어떻게든 잘 지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음식 같은걸 조금씩 떼어놓고 고수레라고 하나, 그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목을 졸렸다고 하니 어머니는 하루 세 번 신묘장구대다라니경을 외우라고 했고, 직장 동료는 티베탄 찬트를 틀어놓으라고 했다. 그것들은 모두 영을 쫓거나 막는 효험을 지니는데, 왠지 그 영들에게 가라고 하기엔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오기 전부터 계속 여기 있었을 것인데, 어디로 간담? 아무튼 영이 날 위협하는 일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이후로는 이따금 건물의 깊은 곳에서, 마치 동굴 속에서 울려오는 듯한 윙윙거리는 대화 소리에서 그들의 존재를 느꼈을 뿐이다. 쇠약해진 틈을 타 때를 놓치지 않고 눈을 맞추고 호객하는 휴대폰 가게의 삐끼들에게 분노하기에는 어딘가 애매한 구석이 있다. 나는 너를 보았다. 라는 문장은. I saw you. 나는 너를 톱으로, 윙윙거리면서. 나는 너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너라는 사람을 갈라 단면을 드러내고, 그 두께를 가늠하고, 너의 추상을 사실로, 구상으로, 물질로 이끈다. 목을 졸렸다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잠을 자다가 겪었던 섬뜩한 영들의 이야기를 덤덤한 표정으로 꺼내놓고는 했다. 어떤 영은 허리에 올라타서 노려보고, 어떤 영은 늘 냉장고 위에 걸터앉아있고. 모두가 겪는 일이었다. 모두가 삶을 구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다. / 20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