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가설이 우리 대신 죽어줄까?: 증언의 세 가지 상태에 관한 단상
[도표 1] 증언의 묵시적 상태에서 발생하는 과거의 반사실적 전환 가능성
[도표 2] 증언의 세 가지 상태에 관한 분해도
‘우리는 결코 어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구호를 들어보셨는지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슬로건 중 하나입니다. 직접 당신의 입으로 말한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를 낡은 것이자 넘어서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응당 나아가야 할 미래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이 슬로건은 역사에 관한 진화론, 시간의 화살, 비가역성의 관점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제가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인데, 특히 모종의 이유로 계속해서 어제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제와 다름없는 유사-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의 어떤 사태를 증언했지만, 그것이 적극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묵살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증언의 수만큼이나 다양합니다. 나의 많은 기억 또한 망각의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단지 그중 몇 가지만을 떠올릴 수 있을 따름입니다:
증언이 거짓말이 아닐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경우. 명백한 위증이 그 허접함에도 불구하고(또는 바로 그 허접함에 의해)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증언을 하던 도중 우연히(또는 고의적으로) 증언자의 목소리보다 더 큰 소음이 발생했다.
증언자가 너무 어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은 경우.
증언된 내용의 비상식적인 사태가 체계 내에서 암묵적인 합리성으로 기능하고 있는 경우.
증언된 사태가 상상할 수 없거나 상상하기 꺼려지는 경우.
이로써 이제 우리는 단지 흥미로운 증언만이 운 좋게 적극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부상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보통 증언이 진실을 지향하는 행위로 이해된다는 점을 떠올리면 사뭇 의아합니다. 앨빈 골드만(Alvin Goldman)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증언 행위를 통해 사회적 진리값(Veritistic Value)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상식선에서 받아들여진 증언은 상식선에서의 개정으로 이어질 따름입니다. 상식적 평가는 사법적 판단의 경우와 달리 청원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상식이 객관적 합리성이 아니라 상호주관적 합리성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인식자의 비인식적 욕망, 그리고 앎이 유통되는 장면의 분위기에 깊이 연루될 수밖에 없는 상식을 바꾸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판결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내가 상식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신념 체계가 집단적 방식으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더 넓은 의미를 포함합니다. 도표1은 상식선에서 일어난 변화(즉 상호주관적 합의 지점의 이동)이 하나의 증언에 관해 취해진 사법적 인정/불인정을 향해 이의를 제기하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 도표는 명시적 증거의 존재 또는 부재를 통해 증언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증거주의적 접근에 대항하기 위해 상식이라는 이름의 집합적인 믿음의 체계가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사건의 ‘그럴듯함’ 또는 ‘공산’을 근거로 드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규범적 또는 심리적 파기자의 존재 또는 부재를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합리적 의심과 회의 능력을 필요로하는 파기자는 과학적 가설에서 ‘반증’이 행하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반증주의는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가설일지라도 단지 오늘까지만 참일 수 있으며, 영원히 불변하는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오류에 의한 죽임을 피하는 생존 전략으로서 객관적 지식의 추구는 이전의 잘못된 가설을 반증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우리를 죽일 뻔했던 가설을 죽일 때라야만, 우리는 그 가설을 죽이지 않은 반사실적 세계에서 우리가 죽었을 가능성을 사색적으로 모의 실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증이 객관적 관찰과 올바른 이론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라면, 파기자는 증언자에 관해 우리가 갖는 주관적인 판단(예컨대 증언자가 보여온 진실의 이력), 또는 기껏해야 규범적 판단(예컨대 제정신인 사람에게 기대하는 인식적 덕)에 기반할 따름입니다.
한 가지 평범한 예를 생각해 봅시다. Bill은 그가 사랑하는 Jill의 말이라면 그 말이 도저히 믿을 만하지 않더라도(즉 범고래를 봤다고 말하는 그녀의 증언이 거짓임을 유추할 수 있는 여러 정황에도 불구하고)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정황’에 대한 인식은 이른바 규범적 파기자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Bill은 Jill이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믿기 때문에, 심리적 파기자 또한 가지지 못합니다. 이렇듯 마땅히 의심할법한 상황에 무지한 것,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박적인 믿음은 Bill이 가진 믿음을 ‘인식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만듭니다. 물론 Jill이 사실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파기자-파기자가 성립하고, 등등. 이러한 의미에서 파기자는 참과 거짓의 여부를 영원히 알 수 없는 증언의 변화하는 상태, 즉 증언의 묵시적인 상태를 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발적으로 편향된 믿음을 감수하며, 곧잘 참의 획득을 우연 또는 운에 맡깁니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상황을 비극적이기보다는 내가 다른 글에서 ‘체계적 비합리성’이라고 불렀던 것의 실존적인 형태로 여깁니다.
한편 청취자에게 실증적 이성의 의무를 지우는 대신, 단지 파기자를 갖지 않음을 인식적 정당화의 충분조건으로 허용하는 비환원주의의 관점이 결국 비이성적인 믿음으로 이어진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상상하기 어렵거나 꺼려지는 것’에 관한 믿음은 증언적 믿음에서 ‘잘 속음(gullibility)’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관한 해결 방법으로 청취자에게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듣기의 행위자성을 요구할 수도 있겠습니다.*** 음, 결국 이것은 청취자의 청력이 모종의 외과수술로 인해 이상하게 개조되지 않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러한 안정성이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의 증언 청취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증언이 청취자를 이중의 위험으로 몰아넣는 순간은 내가 증언의 묵시적 상태라고 부른 것을 거쳐 다시 현재에 도래한 증언입니다.
왜 증언의 묵시적 상태가 중요할까요? 보통 증언 인식론은 증언의 ‘명시적 상태'를 주로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하나의 증언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구분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칼 포퍼처럼 참의 확률적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 이든, 베이즈주의적 접근처럼 믿음을 양화 하는 접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명시적으로 찬성 또는 반대의 대상이 되는 증언보다 그저 묵살되어버리는 증언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오죽하면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가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라고 말했을까요? (저는 이 유명한 시구에서 ‘터져버리는 세상’을 증언을 마침내 들을 수 있도록 청력이 강제로 개조된 사람들의 사회로 상상하기를 좋아합니다.)
단어 자체가 보여주듯, 내포된 상태와 묵시적 상태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는 특히 증언의 내용을 망각하지 않은 증언자가 t2’ 시점에서 재증언을 포기할 때 더욱 불분명해집니다. 상기 도표는 명시적 시간축으로써 t1과 t2, 그리고 내포적 시간축으로서 t1’과 t2’를 제안함으로써 하나의 증언이 거쳐 갈 수 있는 세 가지 상태 변화를 표현합니다. 두 시간축은 증언의 사건 이후 사법적, 또는 상식적 환경의 개편이 일어났는지의 여부로 구분됩니다. t2가 증언 이후 어떠한 종류의 명시적인 반응이라도 존재했던 시간이라면, t2’는 그냥 흘러간 시간입니다. 발화 행위가 어떤 변화도 수반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묵살된 증언에 도래하는 t2’는 여전히 과거로, 이른바 오늘로 가장한 어제입니다.
그러나 묵시적 상태의 증언이 망각, 복원, 추측, 조작을 거쳐 이른바 ‘역사의 다를 수 있었을 가능성'이라는 형태로 t2에 외삽될 때, 증언은 고전적으로 서술된 과거, 즉 t1의 반사실적 전환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의 증언이 망각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이 언젠가 특정한 계기를 통해 다시 개인적 또는 사회적인 의식의 표면으로 부상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여기가 지연된 지각 또는 잊혀진 증거의 문제가 촉발되면서, 사실 적시에 근거한 역사의 서술이 교란되기 시작하는 곳입니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뇌에 관한 기상천외한 외과수술을 자행하곤 하지만, 잊고 있던 무언가를 오랜 시간 뒤에 떠올리게 되는 것이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국적으로 작동하는 인지의 발견법적 추론(이른바 상식)에 정당한 부분이 전혀 없기 때문에, 차라리 외계인의 납치가 더욱더 인과적으로 됩니다.
신빙성 없는 믿음의 원천으로써 외계 존재자를 상정하는 사고 실험들-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것이든, 외계인이 한 말을 믿는 것이든-은 대체로 신경 전형적이고 비장애 중심적으로 구성된 인지적 행위자성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관점에 의하면, 인지적 결함을 가진 이들은 외계인만큼이나 믿을만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더러운 망각의 늪에 빠졌다가 되돌아온 증언은 쉽게 음모론의 원천으로 지목되거나, 픽션과 다를 바 없다는 누명을 쓰곤 합니다. 그러나 달리 될 세계에 대한 기대 없이 감행되는 재증언에 남은 유일한 목표, 그것이 바로 세계 내 진리값의 증대가 아니겠습니까? 상식과 법이 감히 찬성 또는 반대하지 못했던, 묵살된 증언의 귀환으로부터 가장 문제적인 믿음이 시작됩니다.
그리하여 저는 다음과 같은 소정의 결론을 내립니다.
증언이 인정되거나 불인정되는 경우(명시적 상태)보다는 묵살되는 경우(내포된 상태)가 증언이 촉발하는 인식론적 위기의 성격을 더욱 잘 보여줍니다.
이때 청취자의 실증적 이성(즉 객관성을 확보한 믿음)을 앎의 토대로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에 증언에 관한 새로운 비환원주의는 신빙성 없는 믿음의 원천으로써 외계 존재자의 자리에 마찬가지로 믿을만하지 않은 인지 능력을 가진 인지적 스펙트럼의 문제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참고
* Karl R. Popper(1972). Objective Knowledge: An Evolutionary Approach. Oxford University Press
** Jeniffer Lackey(2008). Learning from Words: Testimony as a Source of Knowledge. Oxford University Press. p. 67
*** Jennifer Lackey(2006). “It Takes Two to Tango: Beyond Reductionism and Non-Reductionism in the Epistemology of Testimony” In. The Epistemology of Testimony. Oxford University Press. pp.160~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