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론을 위한 여덞가지 고려 사항 (8 Considerations on the Theory of Testimony)
환원주의의 난점
증언에 관해 취해질 수 있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이때 증언은 단지 법정에서의 증언이나 종교적 증언에 국한되는 대신, 다른 이로부터 전달받는 앎의 사건 전반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에 유념하라.) 그것이 확실히 참이라는 증거가 없는 한 증언을 믿지 않기, 또는 그것이 확실히 거짓이라는 증거가 없는 한 증언을 믿기. 첫 번째 입장은 파생적이고 이차적 앎일 수 밖에 없는 증언은 반드시 환원과 추론을 통해 비파생적이고 일차적인 앎으로 변환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이러한 입장은 일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은 증언적 앎에 의존하여 살아가는지를 고려했을 때 진정한 앎에 대해 지나치게 강건한 기준을 들이미는 것이다. 만약 증언이 언제나 그 증언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를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부모가 알려준 우리 자신의 생일조차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모가 사실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화성인이 부모에게 전파 무기를 사용해서 기억을 조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환원주의의 이점
증언을 뒷받침해줄 객관적으로 환원 가능한 ‘증거'를 요구하는 환원주의적 입장은, 증언에 관한 확실하게 믿을 만한 토대 증거가 있는 한에서만 증언이 믿을만 한 것이라고 본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 반면 증언이 비추론적이고 비환원적인 방식으로 앎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입장은 어떤 증언이 확실하게 틀렸다는 증거가 없는 이상, 그 말을 믿어도 좋으며 때에 따라서는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였던 토머스 리드(Thomas Reid)의 경우가 이러한 비환원적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입장의 근저에는 어떤 ‘말씀'을 조건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믿어야한다고 말하는 모종의 종교적 동기가 놓여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겪었고, 살았다고 확실히 증언될 수 있는 경험이 아닌, 무엇이라고 확신해 말할 수 없고 심지어 그 경험이 내 것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불명확한 경험을 신뢰할 수 있으며, 때로는 신뢰하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무언가를 일단의 잠정적 참으로 간주함으로써만 앎의 사건이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증언에 대한 비환원주의는 신학적인 만큼이나 실용적이다.
화성인 공동체
어떤 증언이 확실하게 참인 증거를 갖지 않는 이상 언제나 틀릴 수 있다면,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보고자 집단으로부터 완전히 거짓으로 구성된 증언만을 듣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은 I에서 개괄된 증언에 대한 비환원주의의 입장이 발생하는 동기다.이 토니 코디(Tony Coady)는 “선생의 발언과 진리 사이에 상관관계가 없는 공동체"일 이러한 가상의 증언자 집단을 화성인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러한 화성인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주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어떤 증언자 집단이 하나의 어휘를 동일한 의미로 일관성 있게 사용하지 않고, 여러 다른 단어가 갑자기 동일한 것을 뜻하거나 현재 동일한 단어가 나중에 가서는 여러 가지 다른 것을 뜻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낱말이 우리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정확히 어떤 사물에 대응하는지, 즉 어떻게 번역될 수 있는지 배울 수 없다. 이 번역의 불가능성은 공동체의 불가능성으로 이어진다.
허구적 명제에 대한 믿음과의 유사성
증언을 믿는 일은 때로 상상할 수 없는 것, 믿을 수 없는 것, 받아들여질 만하지 않은 것을 상상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일이 되곤 한다. 어떤 종류의 증언은 심지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떻다고 믿고 있는 사태와 사실에 관한 명제를 반사실적으로 전환한다. 이것은 대체로 허구적 명제가 수행하는 기능이다. 따라서 믿고 싶지 않겠지만, 증언을 믿는 일은 허구를 믿는 일과 유사할 수 있다. 그렇기에 허구적 사실을 문자 그대로 믿을 때 발생하는 존재론적 책임은 증언적 사실을 믿는 일에서도 발생한다.
생명의 보전
허구에 대한 믿음과 달리 증언에 대한 믿음은 많은 경우 우리의 목숨을 유지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우리는 어떤 경로로 습득했는지 기억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셀 수 없이 많은 앎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순간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는 것은 우리가 명석하게 기억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종류의 앎이 아니라, 그 이유를 미처 알기도 전 어렸을 적부터 체화한, 근육과 내장의 앎이다. 어린이와 동물은 증언에 대한 비환원적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가장 자주 인용되는 믿음 수행의 집단이다. 어린이는 세계가 어떠하다라는 어른의 말이 사실로 그러한지 스스로 증명할 수 있게 되기 이전부터 어른의 증언을 믿는다. 만약 우리가 명징히 증명된 앎만을 참된 앎으로 간주해야만 한다면, 어린이는 자신의 앎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수집하기도 전에 먹어서는 안 되는걸 입에 넣어 배탈이 나거나 위험한 차도로 뛰쳐나갈 것이다. 이때 세계가 어떻다라는 증언, 즉 어떤 것은 먹어서는 안 되고, 도로에서는 신호등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내성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알아야만 한다면, 무언가를 알기 위해 필수적인 살아있음이라는 조건을 만족하기가 어려워진다.
합리적 불신
그러나 V절과 같은 방식으로 옹호되는 증언에 대한 비환원적 입장에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여전히 어떤 증언이 믿을만한 것으로 여겨진다든지, 일관되다든지, 비증언적으로 기술 가능한 여타의 사실들(증거들)과 합치한다든지 하는 질문들이 일소되지 않고 남아있다.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증언에 대한 불신과 이런저런 가설들이 자리 잡고 있다. 때로 이 가설의 설계 능력이 진정한 앎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식자의 능동적 인식 행위를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증언이 도대체 ‘믿을 만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증언자가 실은 계획적인 거짓말쟁이던지, 증언하고 있는 사건의 시점을 기해 적절한 지각과 인식 능력을 지니지 못한 심신미약의 상태였을 수 있지 않은가 의심하곤 한다. 증언의 인과성과 신빙성을 의심하는 이러한 합리적 의지는 증언이 언제든 거짓으로 탄로 날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믿음-사건-조건
우리는 누군가의 과거를 서가의 책을 뽑아보듯 열람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경우 증언하는 이가 증언하는 과거는, 바로 그 증언 행위에도 불구하고 얼마간 불투명한 것으로 남아있다. 아주 잘 규명된 과거, 매우 자명해 보이는 미래조차도 어떤 국면에서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틀릴 수 있음을 알면서도 예언에 의지하듯, 우리는 증언자의 과거를 잘 알지 못함에도 그의 말을 믿기를 선택한다. 납득 가능한 연속성이 포기된 자리에 비로소 믿음이 들어선다. 그래서 믿음은 의지의 발현이 아니라 의지의 포기, 즉 합리적으로 의심할 줄 아는 인식 행위의 포기일 수 있다. 증언을 어떤 보편 원리로 증류하려는 참된 인식자의 태도를 포기하는 곳에서 믿음이 시작된다. 의심의 포기로 가능해진 증언 듣기는 앎의 자리를 대체한다.
행위자성
증언적 앎을 얻는 경우에서처럼 앎의 궁극적 귀속인이 인식자 본인에게 귀속되지 않는 경우, 인식자가 적절한 인식 노력, 능력, 덕, 내성적 판단을 잘 발휘하는 것은 앎을 얻기 위한 궁극적 요건이 아니다. 인식자의 행위자성이 참된 앎을 얻는 데 필수 요건이 아니라면, 인식자의 인식 행위는 어떠한 경위로도 공로를 인정받을 만 하지 않다. 만약 우리가 증언을 통해 앎을 얻는 일을 ‘듣는 능력’이나 ‘듣는 노력’과 결부시킨다면, 듣고 보는 문제는 결국 행위 능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지만 우리가 특정 구간에서 듣기에 대한 ‘노력’을 덜 하거나, 듣기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것을 들리거나 들리지 않게, 믿을만하거나 믿을만하지 않게 만드는 어떤 ‘숨겨진 행위자'로써 치안이나 패권을 고발한다면, 표상되거나 되지 않음이 언제나 인간적 의도와 목적을 운반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변화맹 현상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인식 그 자체가 명백히 보이는 것조차 없는 것으로 만드는 일종의 거름망처럼 기능한다. 따라서 왜 무엇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가를 묻는 대신, 왜 무엇이 보이고 들리는가를 묻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 2021.7-12
참고
Jennifer Lackey(2007), "Why we don’t deserve credit for everything we know", Synthese, 158, 345~61
댄 오브라이언(2011), 『지식론 입문』, 한상기 옮김, 서광사
한상기(2012), “증언에 관한 리드의 비환원주의", 철학탐구, 31, 15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