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허구적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책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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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상이 ‘'언제부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문제로, 결국에는 동일성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때 존재 시점에 관한 문제는 동일성 조건에 대한 질문에서 따라나오는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다. 흙덩이는 어느 시점부터 조각이 되는가? 태아는 언제부터 생명이 되는가? 몇 명의 사람은 언제 ‘새까만' 사람들의 무리가 되는가? 그러나 그 존재 대상이 허구적 대상일 경우, 존재 시점에 관한 문제는 더 이상 ‘~에 따르면'과 같은 내포적 연산자로 허구를 괄호치는 미봉책으로는 틀어막을 수 없는 것이 된다.


XXIII

허구적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책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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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텅 빈 이름이 다만 비어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텅 빈 이름이 포함된 문장을 말하면서 그것을 믿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텅 빈 이름을 믿지 않지만, 텅 빈 이름이 포함된 문장은 믿기도 하는데요. 데이비드 브라운은 이를 두고 채워지지 않은 명제, 또는 구멍 난 명제(gappy proposition)라 불렀습니다. 그는 채워지지 않은 명제일지라도 주장될 수 있고 믿어질 수 있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진짜 명제처럼 진리값을 나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구멍 난 명제는 마치 주파수 변조 과정에서 반송파(Carrier frequency)가 맡는 역할과 비슷해 보입니다. 반송파는 표본화로 찢긴 기저 주파수의 회복 또는 강령술을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XXXIII

허구적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책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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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는 온도계를 참고함으로써 방 안의 온도에 대한 믿음을 형성한다. [...]그러나 사실 온도계는 고장났으며, 정해진 범위 안에서 무작위하게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 Temp가 모르게, 방 안에는 온도조절기를 조종하는 어떤 행위자가 숨어있으며, 그의 역할은 Temp가 온도계를 볼 때마다 방안의 온도가 온도계와 일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Temp 사례는 설령 행위자가 적절한 현실 인식 능력을 지녔고, 그 현실이 인식된 것과 일치하는 경우에조차도 지식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합니다. 그 가정은 주인공이 알지 못하는, 방 안에 존재하는 숨겨진 행위자를 가정합니다. (가장 간편하게는 악마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그 숨겨진 온도조절자는, 주인공 Temp가  고장난 온도계를 바라볼때마다 무작위한 값에 맞추어 방 안의 온도를 조금씩 춥거나 덥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Temp 사례의 숨겨진 행위자(hidden agent)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존재론적으로 책임지거나, 알레고리로 치부하여 텅 빈 이름으로 만들어버리기에 앞서, 그것이 시간을 접었다가 펼치며 오고가는 귀신의 굴신왕래屈伸往來를 보여주는 하나의 자연적인 원리로써 정초된 것은 아닐까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귀신이 하나의 합리적 자연 원리라는 사실이 새롭습니까? 조선에서 귀신의 존재가 초월적이 된 것은 18세기의 실학과 유보론의 영향 이후에야 가능해진 것입니다. 가장 누추하고 어두컴컴한 구석에 혼자 있을 때도 경계하고 삼갈 것을 제언하는 불괴옥루不愧屋漏는 귀신의 집이 아니라 가장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가설된 두려움의 극장입니다. 이 때의 상제귀신은 알레고리도, 텅 빈 이름도 아닙니다. 이것은 너무도 생생하게 현재로 합성해 들어옴으로써, 우리가 현재 미래라고 부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무언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나를 계속해서 알지 못하는 상태로 만드는 무언가가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행운이건 불운이건 어떠한 종류의 운도 차단하는 일을 필요로 하는데요. 하지만 운이 개입하지 않는 것(악마가 없을 가능성) 자체가 하나의 운일 수 있지 않은가요? 반-운 조건이 그 자체로 하나의 행운이 되고, 운이 개입하는 상황이 그 자체로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 Duncan Pritchard, “Anti-Luck Virtue Epistemology” , The Journal of Philosophy, 2012, 109(3): 247-279. p.260


XXXIX

허구적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책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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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그리고 그 법을 기록하는 펜과 문자는 때로 남성적 지식 패권을 보여준다고 해석됩니다. 하지만 오히려 암묵지 또는 비문자적 지식 전승 체계가 훨씬 더 남성 패권적이지 않은가요? 우리에게 말과 글로 주어진 것, 그리고 말과 글로 주어지지 않은 것 모두 헤게모니화된 지식 전달 체계 아래 있습니다. 이것이 말과 글과 언어가 그토록 골치 아픈 이유입니다.


언어가 골치 아픈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드는 만큼이나, 없는 것을 있게 만듭니다. 무언가를 언급하는 일은 언제나 무언가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원리에 따라, 무언가를 언급하지 않는 행위 자체가 무언가를 언급하고 맙니다. 언급하지 않음이 언급함을 통해, 언급이 언급하지 않음을 통해 가능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언어가 골치 아픈 첫 번째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패권이 삭제한 것들을 다시 보이고 들리도록 할 것을 요구하는 일 이상으로 나아가야만 하는데, 이것은 언어가 골치 아픈 두 번째 이유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언어의 기능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 허구적인 대상을 실재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세 가지 정도를 이야기해봅시다. 우선 앞서 언급한 맥락과 관련한 허구적 대상의 실재적 기능은, 헤게모니가 강제하는 인식적 가름선을 허구적인 것으로 폭로하는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성별 이분법은 전부 (실재로 전환된) 허구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입장을 긍정하는 것은 본질주의를 때리는 전략으로써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우리의 실재적 경험을 배반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가령, 언어보다 더욱 강력하게 우리를 옭아매고 골치 아프게 만드는 신체에 관해 생각해 봅시다. 그런 신체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몸 앞에서 어떠어떠한 가름선들이 다만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일은 다소 공허합니다. 이 몸에 있어서 그러한 가름선들은 매 순간 너무도 실재적이으로 몸을 옥죄며, 바로 그 이유로 몸을 최소한의 일관성, 마지막 고정점에 붙들어 주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보다 일반적인 경위에서 허구의 실재적 기능은, 무엇이 없음에도 있는 척하는 경우와 관련됩니다. 이러한 ‘꾸며내기' 또는 ‘믿는 체 하기'는 주로 어떤 인간적인 관습이나 이해, 또는 동의를 전제로 하는데요. 그러한 맥락이 전제되는 한에서 허구적 대상, 그리고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은 실재할 수 있고 작동할 수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라, 원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마법 원'으로 진입한다는 고전적인 놀이 이론은 이와 같은 ‘믿는 체 하기' 모델을 따릅니다. 반면, 우리가 꾸며내거나 믿는 체 하지 않아도 허구적 대상과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이 작동한다고 보는 입장도 존재합니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도래할 수 있는 가능 세계에 대한 소묘는 이러한 허구-기능에 관해 기대되는 가장 건전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동일한 원리에 따라, 개소리 또한 실재가 된다는 사실에는 왜 다들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인가요? 이 개소리의 생산자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허구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허구-기능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대략 두 가지 가능한 안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찰적으로 언어를 정제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언어의 곤혹스러움과 더러움을 증폭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가 왜 길이 이따위로 났는지 탐색하기 위해 길의 시작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후자는 없는 길을 냅니다. 이때 길을 낸다는 것은 개척주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궁지에 몰린 쥐가 쥐구멍을 파고 들어가는 굴과 비슷한 것으로…(계속)

(미게재)

허구적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책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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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약속’은 온갖 쥐새끼가 들락날락 거리는 '구멍 난 명제'일까요?* 그것은 실속없이 비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값을 나릅니다. 오히려 군데군데 벌레먹고 기반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무엇이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체감을 단속하고 보장하는 경계를 약화하는 개방성의 역할입니다. 하지만, 텅 빈 이름이 실재로써 기능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사실 완전히 다른 문제이며, 실은 더욱 오래된 문제입니다. 허구적 대상이 허구적 맥락 바깥에서도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 도대체 가능할법하지 않은 것들과 수 많은 개소리들의 실재를, 존재를 책임져야 합니다. 


* “허구적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책임2”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