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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적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책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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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그리고 그 법을 기록하는 펜과 문자는 때로 남성적 지식 패권을 보여준다고 해석됩니다. 하지만 오히려 암묵지 또는 비문자적 지식 전승 체계가 훨씬 더 남성 패권적이지 않은가요? 우리에게 말과 글로 주어진 것, 그리고 말과 글로 주어지지 않은 것 모두 헤게모니화된 지식 전달 체계 아래 있습니다. 이것이 말과 글과 언어가 그토록 골치 아픈 이유입니다.
언어가 골치 아픈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드는 만큼이나, 없는 것을 있게 만듭니다. 무언가를 언급하는 일은 언제나 무언가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원리에 따라, 무언가를 언급하지 않는 행위 자체가 무언가를 언급하고 맙니다. 언급하지 않음이 언급함을 통해, 언급이 언급하지 않음을 통해 가능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언어가 골치 아픈 첫 번째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패권이 삭제한 것들을 다시 보이고 들리도록 할 것을 요구하는 일 이상으로 나아가야만 하는데, 이것은 언어가 골치 아픈 두 번째 이유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언어의 기능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 허구적인 대상을 실재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세 가지 정도를 이야기해봅시다. 우선 앞서 언급한 맥락과 관련한 허구적 대상의 실재적 기능은, 헤게모니가 강제하는 인식적 가름선을 허구적인 것으로 폭로하는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성별 이분법은 전부 (실재로 전환된) 허구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입장을 긍정하는 것은 본질주의를 때리는 전략으로써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우리의 실재적 경험을 배반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가령, 언어보다 더욱 강력하게 우리를 옭아매고 골치 아프게 만드는 신체에 관해 생각해 봅시다. 그런 신체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몸 앞에서 어떠어떠한 가름선들이 다만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일은 다소 공허합니다. 이 몸에 있어서 그러한 가름선들은 매 순간 너무도 실재적이으로 몸을 옥죄며, 바로 그 이유로 몸을 최소한의 일관성, 마지막 고정점에 붙들어 주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보다 일반적인 경위에서 허구의 실재적 기능은, 무엇이 없음에도 있는 척하는 경우와 관련됩니다. 이러한 ‘꾸며내기' 또는 ‘믿는 체 하기'는 주로 어떤 인간적인 관습이나 이해, 또는 동의를 전제로 하는데요. 그러한 맥락이 전제되는 한에서 허구적 대상, 그리고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은 실재할 수 있고 작동할 수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라, 원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마법 원'으로 진입한다는 고전적인 놀이 이론은 이와 같은 ‘믿는 체 하기' 모델을 따릅니다. 반면, 우리가 꾸며내거나 믿는 체 하지 않아도 허구적 대상과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이 작동한다고 보는 입장도 존재합니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도래할 수 있는 가능 세계에 대한 소묘는 이러한 허구-기능에 관해 기대되는 가장 건전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동일한 원리에 따라, 개소리 또한 실재가 된다는 사실에는 왜 다들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인가요? 이 개소리의 생산자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허구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허구-기능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대략 두 가지 가능한 안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찰적으로 언어를 정제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언어의 곤혹스러움과 더러움을 증폭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가 왜 길이 이따위로 났는지 탐색하기 위해 길의 시작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후자는 없는 길을 냅니다. 이때 길을 낸다는 것은 개척주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궁지에 몰린 쥐가 쥐구멍을 파고 들어가는 굴과 비슷한 것으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