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

표절하는 감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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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에 대한 표절은 저작권 보호라는 명목 아래 저지되지만, 감상에 대한 표절은 그 수위성을 수치화하기도 어렵고,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피해 여부를 가시화하기 어려운 탓에 아직까지 이렇다 할 제재가 없었다. 그 틈을 타 감상을 표출하는 일은 ‘콘텐츠 큐레이팅' 이라는 이름의 대가 없는 잉여 가치로 실질적으로 포섭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창작물이 아닌 감상을 표절하는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표절하는 감상자에게 있어서, 창작물 x가 어떠어떠한 방식으로 논평되거나 합의될만한 이유는, 그것이 그럴만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일 따름이다. 또한 창작물 x가 어떠어떠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그것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이미 논평되거나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즉, 창작물 x에 대한 적법함과 이미-판촉됨은 서로를 순환적으로 보증한다.


표절하는 감상자는 상호주관성에 의거하여 논평한다. 상호주관성은 무엇이 적법한가에 대한 공통의 지평을 상호 판촉하는데, 이 과정은 어떤 앎이 어디서 왔는가에 관한 탈인용을 수반한다. 이러한 탈인용은 감상자가 어떠한 앎을 다른 앎의 토대로 삼기 위해 필수적인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모든 출처를 공평하게 밝혀야만 할 것이고, 그것은 대체로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도 우리가 아는 많은 것들은 우리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학습된 것이다. 누군가는 앎의 출처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앎이 아니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앎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것은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하간 그것이 틀림 없음을 잘 알고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앎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만약 어떤 지식을 어디서 얻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지식을 진정한 앎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도 적은 지식만을 진정한 앎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앎의 출처가 의식의 표면과 완전한 망각 그 어디즈음을 부유할 때, 그것은 혀 끝에서 맴돌며 단어로 종결되지 못한다. 심리학의 창시자 윌리엄 제임스는 이를 설단 현상(Tip of Tongue Phenomenon)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체로 설단 현상은 콘텐츠의 신속한 채굴을 방해할 따름이기에, 감상자는 다른 감상자의 감상을 탈인용한 후 그것을 적법한 것으로 공표한다. 이에 따라 표절하는 감상자는 확신과 더불어 공통의 지평을 효과적으로 판촉할 수 있게 된다. / 202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