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롯
플로터(Plotter)에 대해 잠깐 얘기해보려고 한다. 흔히 숙제 기계 혹은 드로잉 기계로 불리는 XY-플로터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는 인형뽑기 기계와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인형뽑기 기계는 목표 지점에서 Z축 방향으로 하강 운동이 더해진다는 것이다. 수직 운동의 주체 자리에 집게발이 아니라 스핀들을 달아 CNC(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 기계를, 노즐을 달아 3D 프린터를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z축의 제어 및 나머지 두 축과의 보다 정확한 연동을 위해, grbl과 같은 파싱(Parsing) 펌웨어가 이용되기도 한다.
인형뽑기 기계가 주는 기쁨은 수치 제어 프로그래밍 언어인 G-code가 자동 제어해주기 마련인 XY-플로터의 평면상 좌표값을 인간의 의지가 결정할 수 있다는 제스처를 남겨두는 데 있다. G-코드는 좌표 뿐만 아니라 움직임(드로잉)의 속도도 조절하는데, 대부분의 인형뽑기 기계에 부착된 조이스틱은 고정된 속도값을 지니고 각 방향에 해당하는 푸쉬 버튼을 온-오프하는 정도의 원리로 움직이고 있다. 이는 플로터의 원리가 상당히 둔탁함을 의미하며, 조이스틱은 형상-속도와 방향에 대한 긴밀한 조작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기만적인 유선형 디자인임을 알 수 있다.
이 둔탁함은 대부분의 게이미피케이션의 작동 원리이자 결과이다. 유동성을 구현하기 위해, 정말로 행위자를 어디론가 옮길 필요는 없다. 때때로 행위자가 언제든지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스쳐로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하지만 푸쉬버튼으로 제어할 수 있는 조작의 자리에 조이스틱을 꽃아두는 것과 같은 예는 아마도 다른 이야기이리라. 속도와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감각조차도, 제스쳐로써 구현되곤 한다. 그러나 근래에 우리는 자율적인 제어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키네틱 기계에 대한 임상 검증을, 돈을 받기는 커녕 지불하면서 해주는데, 그것도 비싼 값에 치르곤 한다.
‘빠르다’고 느끼는 속도와 그것을 추동하는 강도의 문제가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라는 이름의 제스쳐로 전면 대체되기 전의 시공이 아직 남아있는데, 그 망형(網形)의 시공에는 아직도 청소년들이 매연을 내뿜는 오토바이를 탄 채 목숨을 건 배달 대행을 하고, 택시기사는 여성 승객에게 반말을 내뱉는다. 그 시공은 도심 곳곳의 공실에 깔세로 들어왔다가 완만하게 자리잡은, 셀 수 없는 인형뽑기방인 동시에, 하나의 커다란 인형뽑기 기계 속이기도 하다. 이 기계에는 xyz축의 조작을 엄밀하게 만드는 파싱 펌웨어따위는 없다. 이곳은 헐겁게 덜렁거리는 커다란 집게발의 그늘이 내 위에 드리우기 전에 알아서 각자도생하는 곳이다. / 2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