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에 부친 글:
어떤 영역을 극단으로, 또 다른 영역은 중도(golden mean)로 설정하는, 어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언어가 있다. 그리고 학문이나 이데올로기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다른이들의 삶과 비교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삶이, 혹은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의 삶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가늠해보기 위해 이 용법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자신이 안정적인 삶의 궤도에 있는지, 혹은 불행이나 위험에 처해있는지, 만약 그러한 상황이라면 그 정도는 얼마나 심각한지.
나는 이와같이 개인이 자신이 처한 폭력의 상황을 인식하고 표현하고자 할 때, 사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적당한 것/정도/선'을 표현하는 언어가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가 궁금했다. 결론을 내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내 삶이 불행한지 그렇지 않은지, 혹은 내가 폭력의 상황에 놓여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많은 경우 나와 비슷한 선례를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폭력이나 행복, 불행을 표현하는 언어에 관한 문해력이 생겨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용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보고 배웠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이 용법을 갖고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면, 그 사람이 자신의 불행을 적절히 표현하는 언어를 갖지 못하고 있다고 마음껏 진단하기도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섣부른 예감들과 연관이 있다.
-폭력을 규정하는 주체는 언제 성립하는가?
-폭력을 규정하는 객관적 기준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그 잣대를 타인에게 들이댈, 권리 내지는 자격이 내게 있는지?
-폭력을 구성하는 언어를 만족하면, 그것은 폭력인가?
-너무 오랫동안 너는 불행을 표현하는 적절한 언어를 갖지 못해, 그것을 잘못 표현하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해왔고, 그러한 너의 언어는 내게 번역될 수 없다.
-그러나 어쨌거나 너의 말보다는 나의 생각이 더 맞는 것 같고, 나는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여기기에, 나는 너를 폭력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나는 네게, ‘너는 네가 있는 곳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타인의 상황을 위험하고 불행한 것으로 규정하고, 안락 지대로 신체를 움직이라고 조언할 권리, 내지는 자격이, 그 폭행의 상황 밖에서 다른 용법의 언어를 쓰며 살아가는 나나 타인에게 과연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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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 김넝쿨, 남유진, 주한별, 최여련, 최윤민, 심스타파스
출연: 김진문, 송아영, 송현기, 신유민, 이정현, 염문경, 윤은지, 윤혁진
포스터 디자인: 김은희
제작 지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융합예술센터
공간 후원: 인디아트홀 공